-
[벌새] 지금은 어디에서 날갯짓을 하고 계신가요??영화&드라마 2022. 4. 24. 23:59
2022년 4월 23일
은희는 짜증이 난다.
주변에선 참 이해하기 힘든 일들만 끊임없이 일어난다.
가족들은 이렇게 바스러져버릴 것 같은 관계를 왜 지속하는 걸까?
절친이라고 생각한 아이는 왜 나를 배신한 걸까?
나를 좋아한다던 아이들은 왜 나를 외면하는 걸까?
그렇다고 또 자신을 위해 울어주고, 걱정해주는 모습을 보면 당혹스럽기만 하다.
그리고 한문 선생님은 왜......?
이렇듯 은희는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힘들다.
이유 같은 건 생각할 틈도 없이 마치 갑자기 불어오는 세찬 바람처럼 무심하게 많은 일들이 계속해서 은희를 밀쳐낸다.
은희는 그저 힘겹게 날갯짓을 이어갈 뿐이다.
타인과의 관계성은 단순한 실 하나로 묶여있는 것이 아니다.
다른 방향에서 온 실들이 얽혀있기도 하고 그 연결이 생각보다 강하기도, 약하기도 하다.
또는 남의 마음에 의해 자기성찰을 하는 순간이 있다.
중2라는 혼란한 시기라 더 잘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, 평생 동안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.
은희는 수학여행 가기 위해 운동장에 나와 떠들고 있는 반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아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?
내가 생각하는 찬란히 빛나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고.
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순간이, 그리고 앞으로의 순간들이 빛바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.
가혹할지도 모르지만 1994년의 시대에서는 무엇보다도 흔한 일이었을 그 환경에 의한 한 아이의 내적 변화가 과연 그 시대에만 국한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.
나의 10대 시절인 2000년대도 다르지 않았고 지금의 아이들에게도 과거의 아이들에게도 이러한 상황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.
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이 구간에서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가장 많이 정립해나간다.
고3때 있었던 일이 갑자기 생각난다.
어쩌다 보니 우리 반 아이들의 생기부가 교실에 있었고 나 혼자 덩그러니 반에 남아있어서 보게 되었다.
내 번호 바로 뒤의 그 친구가 한부모 가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.
그때의 나는 한 부모 가정이라는 것을 미디어 매체를 통해서만 어렴풋이 보았기에 실제로 한부모 가정을 보니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.
나는 그러면서도 감히 측은함을 느꼈다.
하지만 그렇다고 그 친구와의 관계가 딱히 변한 적은 없었고, 그저 예전처럼 잘 지냈다.
이렇게 누구나 자신만의 아픔이 있으며 그것은 보이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.
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더 마음에 들었다.
상식만천하, 지심능기인.
한문 선생님이 설명해주신 이 고사성어는 명심보감 교우 편에 나오는 말이다.
'얼굴을 아는 이는 세상에 많지만, 마음을 아는 이는 몇이나 되겠는가'는 의미로써 이 영화의 모든 부분을 관통하는 말이다.
이 말을 김보라 감독은 현명하고 재치 있게 영상으로 현현해나간다.
너무나도 멜랑꼴리 하고 감정의 변화가 극적인데도 나는 영화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고 그에 대해 여운도 짙게 남았다.
내가 지나왔던 시절이었기에 더 그러했을까?
은희 역할이었던 박지후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를 사로잡았다.
본인의 집보다 한층 아래에 온 것을 모르고 엄마에게 문을 열라며 소리치던 연기, 그리고 잘못 찾아온 것을 깨닫고 다시 올라가 마중 나온 엄마를 바라보는 그 얼굴에서 소름이 끼쳤다.
그 나이 또래의 배우였기에 가능했던 것일지는 의문이지만 그런들 어떠하랴.
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바라보는 은희의 얼굴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박지후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.
그리고 주변 사람들 또한 정말 내 주변에 있었을 거 같은 인물들이라 누구 하나 영화의 몰입감을 망치지 않는다.
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시선을 빼앗긴 것은 바로 카메라의 구도이다.
나는 가끔 한 곳을 응시하고 멍하니 있는 경우가 많다.
하늘, 햇빛, 달, 창문 밖, 길거리 사람들, 참 많은 것들을 멍하니 바라본다.
이 영화의 촬영 방식에서 그런 것들을 꽤나 많이 발견했다.
사람들이 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후 불이 꺼지기까지의 텅 빈 현관.
뻥 뚫린 하늘을 위아래로 날아다니는 두 아이.
같은 구도이지만 참 다른 느낌이었던 식탁.
그리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그저 그 아이들을 지긋이 바라보는 또 다른 아이.
시간을 들여 편린적인 한 순간을 멀리서 바라보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.
휴, 이상하게 글이 조금 길어진 느낌이다.
은희야, 아니 나이로 보면 누나일 테니깐, 은희 누님 건강하신가요?
당신은 어디서 날갯짓을 하고 있으신가요?
'영화&드라마' 카테고리의 다른 글
[애나 만들기] 어쩌면 특별해지고 싶은 우리들을 비추는 거울 (0) 2022.05.01 [타미 페이의 눈]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행보에 조용히 박수를 (0) 2022.04.24 [사마에게] 또 어딘가의 와드에게 (0) 2022.04.17 [나일강의 죽음] 사랑이라고 변명하지 마라 (0) 2022.04.10 [릭 & 모티] Morty, Fuck, Shit (0) 2022.04.03